[청년아카데미] 험난할망정 영광스런 먼길 2

백산(白山)의 동지들, 동암 서상일

충북청년신문 | 기사입력 2020/11/15 [17:46]

[청년아카데미] 험난할망정 영광스런 먼길 2

백산(白山)의 동지들, 동암 서상일

충북청년신문 | 입력 : 2020/11/15 [17:46]

      

                       [청년아카데미] 험난할망정 영광스런 먼길 2

 

백산(白山)의 동지들

- 동암 서상일

 

2

 

                         동암 서상일 선생(왼쪽 안경 쓴 사람)은 5.16후 혁신계 활동으로 옥고를 치렀다

 

조선국권회복단은 앞서 결성된 대동청년단의 전위조직 역할을 했다. 조선국권회복단은 중앙총부와 마산지부를 설치해 대동청년단과 유사한 조직체계를 갖고 있었다.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한 동암은 만주 노령지방 동지와의 연결을 위해 윤창기 · 이시영 · 박영모 등과 함께 상업 시찰을 명목으로 여행을 계획한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는 변상태로 하여금 43일 경남 창원에서 수천 명을 동원, 진동 헌병주재소 습격사건을 일으킨다.

 

조선국권회복단은 또 19194월 경상도 유림들이 중심이 된 독립청원서 사건과도 깊은 관련을 맺는다. 동암은 김응섭과 남형우가 파리강화조약회의에 제출하려던 독립청원서를 상해로 가지고 갈 때 독립운동 자금 5천원을 준다. 동암이 운영하던 태궁상점은 조선국권회복단의 거점으로 연결돼 있었다.

 

조선국권회복단 단원들은 대구권총사건(1915년 군자금모집 사건) 등 각종 사건에 연루돼 체포되지만 조직에 대해서는 전혀 발설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앙총부사건으로 조직의 실체가 드러나자 1920년대 들어 단원들은 조선노동공제회 등에 가입, 사회주의 운동과 제휴 지는 사회주의로 전환하게 된다.

 

동암 역시 조선국권회복단의 노출과 3·1 운동 이후 거세진 일본의 탄압 등으로 그 동안의 극단적인 운동 방식 한계를 느끼고 계몽운동과 교육활동으로 방향을 바꾼다.

 

동암이 한창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을 당시, 동암의 동생 서상한은 1918년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 도중 조선총독폭탄암살기도사건(소위 서상한 사건)을 일으켜 투옥된다.

 

1914년 대구고등보통학교에 재학중이던 서상한은 일본으로 가 메이지대학 전문부 경제과를 거쳐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입학한다. 서상한은 재학 중 고향에서 학비가 오지 않아 신문배달 직공 인삼장사 등으로 고학하면서 조선고학생 동우회를 조직해 항일 운동을 계획한다.

 

1920429일 영친왕7) 이은과 일본황족 방자와의 결혼이 발표되자 서상한은 두 사람의 혼인이 거행된다면 조선의 독립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 저지 계획을 세운다.

 

서상한은 우편배달부로 가장해 식장에 폭탄은 던지고 사이토 조선총독을 암살하는 한편 내무성 외무성 경시청 등도 폭파하기로 하고 일본인 학생 이마카와, 우에무라 등과 폭탄을 제조해 동경 오지원에서 두 차례나 성능 시험을 하면서 치밀한 계획을 수립한다.

 

이 폭탄 암살 계획은 그러나 일본 경찰의 밀정인 주오대학생인 신모의 밀고로 서상한이 411일 체포됨으로써 실패로 돌아간다.

 

그는 19207월 동경지방재판소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했으나 922일 고등재판소에서 금고 4년형을 받는다. (기록에 따라 서상한이 받은 형이 징역 4년형, 금고 4년형, 징역 7년형 등으로 엇갈린다)

 

당시 관련 혐의를 받은 사람은 양주영 · 윤제풍 · 조동식 등 15명에 이른다. 동암의 막내딸 태주씨는 삼촌은 동경에서 50년을 사셨고 대구에 다녀가신 것은 두 차례뿐인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조선국권회복단은 1915년부터 2년동안 독립운동 군자금 모금에 나선다. 그러나 정운일 · 최병규 · 최준명 등이 중심이 돼 19154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대구의 부호를 대상으로 모금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이들은 19168월 서우순의 금고를 털기로 모의하고, 93일 실행에 옮기지만 미수에 그쳐 9명의 동지가 일경에 검거되고 재판에 회부된다. 1917년 대구 복심법원에서 김진우 징역 12, 김진만 · 정운일 · 최병규 징역 10, 권국필 · 임준 징역 2, 이시영은 징역 4개월을 각각 선고받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국권회복단의 군자금 모집 활동은 위축되지만 3·1 운동 후 다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인다. 특히 상행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조선국권회복단 노백린이 군사 3만 명을 교련한다고 선전하면서 이를 명분으로 자금 후원에 착수한다.

 

그 결과 배상연이 5천원, 서상환 · 서상호가 1만원, 최준이 얼마를 냈으며, 이렇게 모금된 돈은 동암을 통해 임시정부의 활동비로 전달된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조선국권회복단은 대동청년단 · 대한광복회 등과 함께 활발한 활동을 한다. 조선국권회복단의 이시영, 대동청년단의 김관제, 두 단체에 모두 속해 있던 변상태가 223일께 서울에 파견된다. 이들은 3·1 운동에 참여한 후 의거의 연락을 위해 이시영은 만주, 김관제는 경남 동부, 변상태는 경남 서부 방면으로 각각 항했다. 이 가운데 변상태는 453일 발생한 삼진의거(진동사건)를 주도한다.

 

동암은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일제에 의해 내란죄로 투옥된다. 동암은 이에 앞서 신조선이란 비밀결사를 결성한다.

 

동암이 3·1 운동과 관련해 투옥된 것은 조선국권회복단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나 자신이 해방 후 남긴 글에서는 신조선이란 또 다른 이름의 비밀결사를 언급하고 있어 두 단체의 연관성 여부가 주목을 끈다.

 

동암은 험난할망정 영광스런 먼 길이란 글에서 “1918년말부터 신조선이란 비밀결사 조직에 착수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동암은 신조선이 파당적 상형만을 일삼는 독립운동가들의 일대 혁신을 부르짖고독립운동 세력을 총망라하는 새로운 기운을 조성할 것을 목적으로결성됐다고 밝히고 있다.

 

동암은 이어 신조선 회원은 3·1 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나는 내란죄의 죄명을 쓰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고 밝혔다.

 

동암이 말하는 신조선이 조선국권회복단과 관련된 단체인지 같은 단체의 다른 이름인지의 여부는 불투명하다.

 

19194143·1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될 즈음, 동암은 만주 안동의 신동상회에서 파견된 문상직(경북 고령 출신)을 만나 임정의 선언문과 강령 문서 10매를 은밀히 전달받고 신상태와 함께 대구 · 마산 등지에 배포한다.

 

문상직은 상해 임정 통신원 황대벽으로부터 남한 지방에 배포할 선언문과 강령 등 50매를 받아 이를 전달하는 임무를 띠고 국내로 들어온 것이다. 이후 문상직은 조선내 관공서와 일인 고위관리 폭탄 습격을 계획하다 1920년 검거돼 징역 5년형을 선고받는다.

 

문상직으로부터 임정 문서를 받아 배포하던 동암은 지주와 상인 등 부호를 대상으로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벌인다. 이때 동암은 신상태를 마산 방면으로, 김재열을 청도 방면으로 각각 파견하여 군자금을 모집했으며 자신은 대구 경찰서가 발행하는 여행 허가서를 발부받아 탈출을 준비했지만 주선국권회복단의 전모가 노출되면서 실패한다.

 

동암의 항일운동 방식은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대구에서 조양회관(1922)을 설립하고 학교(현 대구 대륜고)를 세우는 등 교육 · 문화 운동에 힘을 기울이며 타협적인 자치론으로 기울어진다. 동암의 이 같은 투쟁 방향의 전환은 일제시대 항일운동 과정에서 계몽운동 계열이 가지는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대구시 중구 대신동에 세워진 조양회관은 동암이 청년들의 계몽을 위해 세운 것으로 애초 청년회관이란 이름을 사용하려 했으나 일제가 청년이란 단어가 불온하다고 해 조양’(아침해가 비치는 곳이라는 뜻으로 독립을 의미함)으로 명칭이 바뀐다. 동암은 조양회관을 통해 시국강연, 국산품 애용운동, 상공업 진흥, 교육사업 등 다양한 활동을 벌인다. 1927년 신간회8) 대구지회 결성식도 이 조양회관에서 열렸다.

 

조양회관은 1953년 동암이 사위 이응창으로 하여금 학교를 설립케 해 자신이 재단이사장을 맡고 학교법인 조양회관(현 대구원화 여중·고 재단)으로 바뀐다.

 

한편 1923년부터 동아일보지국장을 맡아 17년간 운영하면서 동암은 1926년 어느 날 신문배달을 하던 고학생 이응창(우재 이시영의 외아들)을 만나게 되고 훗날 이응창을 사위로 맞이 한다.

 

동암은 19291018일 발생한 장진흥의 대구 조선은행 폭파사건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대구 경찰서에 투옥돼 다시 한번 옥고를 치른다.

 

해방 후 동암은 정치에 뛰어든다. 한민당의 창당을 기점으로 정치 일선에 나서는 동암은 제헌국회의원에 입후보해 당선된다. 그러나 우익 보수주의로 정치에 첫 발을 내디딘 동암은 이승만 정권과 한민당의 밀월관계가 깨지면서 체제비판 세력으로 야당의 중심에 서서 반독재, 혁신정치로 노선을 전환한다.

 

국제구락부사건9)(1952)과 이승만 대통령 시해음모사건(1952)에 관련된 혐의를 받고 투옥돼 풀려나온 동암은 민주대동 통일운동에 나선다.

 

1955년부터 죽산 조봉암과 함께 진보당 결성을 추진, 본격적으로 혁신정치에 나선 동암은 조직상의 의견 대립으로 얼마 후 진보당추진위에서 탈퇴, 195710월 혁신정당인 민주혁신당을 결성한다. 동암은 4·19 혁명 직후인 19605월 윤길중 · 김성숙 등과 함께 사회대중당을 창당, 5대 민의원 선거에서 대구에 출마해 당선된다.

 

동암은 5·16 쿠데타 후 혁신적인 언론 기관이 필요하다고 보고 이를 추진하기도 했지만, 쿠데타 정권에 의해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으로 기소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사회대중당 분열 이후 동암은 다시 1961년 통일사회당을 창당하지만, 1962418일 지병으로 일생을 마감한다.

 

보수대 혁신 구도의 정착에 정치의 생을 바친 정치인 서상일의 좌절은 혁신정치 세력이 반공이란 이름 아래 침묵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정치 구도와 맞물려 있었다.

 

 

1) 안희제(1885-1943)는 본관이 순흥이고 호는 백산이다. 경상남도 의령에서 출생하였으며 양정학교를 졸업하였다. 1909년 서상일과 함께 항일비밀결사인 대동청년단을 조직하고, 1911년에는 북간도와 시베리아를 돌면서 독립군 기지를 돌아보고 귀국하여 부산에 백산상회를 열고 무역업에 종사하면서 그곳을 국내 독립단체의 연락처로 삼았다. 1925년 중외일보사를 인수하여 사장이 된 후 총독정치를 비난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1933년 중국 흑룡강성에서 발해 농장과 발해학교를 세워 교포의 생활 안정과 청소년 교육에 힘쓰고, 대종교를 통하여 민족자주정신을 고취하였다. 194211월 일본 경찰에 체포 · 구금되었다가 9개월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이듬해 목단강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2) 19083월 서울에 있던 경상도 출신 문화계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교육의 보급 · 국권회복 · 산업발전 · 인권옹호 등을 목적으로 조직한 애국계몽단체. 19094교남교육회잡지를 창간하여 근대적 학회지의 효시를 이루었다.

 

3) 1909년 조직된 비밀결사의 독립운동 단체. 회원수는 약 80명이었으며 회원구성은 전국적이었다. 1910년대 항일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여 활약하기도 하였으며, 1919년에 3·1 운동때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중심인물은 서상일 · 안희제 · 남형우 · 김사용 · 김동삼 · 신백우 · 신팔균 · 신성모 등으로, 국내외에서 비밀지하운동을 전개하면서 30년 동안 지속하였으며 1945년 광복때까지도 정식으로 해체되지 않았다.

 

4) 19151월에 국권회복과 대규모 항일 운동을 목적으로 윤상태, 서상일, 이시영 등이 주축이 되어 경상북도 유림들을 포섭하여 경북 달성군에서 조직하였다.

 

이들은 단군을 모시고 목숨을 다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할 것과 함께 군자금 모집, 4·3 창원만세운동 주도, 파리강화회의 제출용 청원서 작성 등의 활동을 하였다.

 

5) 19157월 경북 대구에서 박상진을 주축으로 경상북도 풍기의 광복단(1913년 결성)과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1915년 결성)의 일부 인사와 통합하여 결성하였다.

 

이들은 대구의 상덕태상회와 영주의 대동상회를 비롯한 각 지역에 설립한 곡물상과 잡화상을 연락의 거점으로 삼아 군자금 모집, 친일 부호 처단, 독립군의 양성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1918년 조직망의 발각으로 일제에 의해 해체되었다.

 

6) 1911년 서양 열강의 금융자본 차관으로 재정난을 타개하려는 청이 민영철도를 국유화한다고 발표하자, 이에 자극되어 1010일 우창에서 봉기한 것이 계기가 되어 2000년간 지속되어 오던 전제정치의 청조를 멸망시키고 중화민국을 탄생시켜 공화정치의 기틀을 마련하게 한 혁명.

 

쑨원을 임시 대총통으로 하고 난징 정부를 수립하여 삼민주의를 지도이념으로 하는 중화민국을 발족하였다.

 

7) 이름은 은. 고종의 일곱째 아들, 순빈 엄씨 소생. 순종의 이복동생. 1900년 영왕에 책봉되었다가 1907년 황태자에 책립됨. 11세때 강제로 일본에 끌려가 교육을 받고 일본 나시모토노미야의 딸 마사코와 정략 결혼을 강요당하여 비로 맞았다.

 

광복 후 일본 왕족의 몰락과 더불어 고난의 세월을 보내다가 196311, 56년만에 환국을 하였으나 귀국 후 7년여 병상 생활을 하다가 한많은 생을 마쳤다.

 

8) 19272민족유일당 민족협동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제휴하여 창립한 민족운동 단체이다. 설립의 목적은 조선 민족의 정치적 · 경제적 해방, 조선의 독립이고 주요 활동은 근검 절약운동의 전개, 청년운동의 지원, 각 지회의 설치 등이다.

 

1930년에는 전국에 140여 개의 지회와 39,0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였으며, 일본까지 조직된 각 지회를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9) 1952620일 부산의 국제구락부에 모여 정부측이 내놓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에 반대하여 반독재 호헌구국선언을 꾀한 사건.

 

부산일보, 199682(), 89(), 816(). 다시 쓰는 人物독립운동사

 

 

동암 서상일선생 기념사업회, 멀고 먼 영광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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