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아카데미] 험난할망정 영광스런 먼길

백산(白山)의 동지들, 동암 서상일

충북청년신문 | 기사입력 2020/11/12 [11:37]

[청년아카데미] 험난할망정 영광스런 먼길

백산(白山)의 동지들, 동암 서상일

충북청년신문 | 입력 : 2020/11/12 [11:37]

                   

                         [청년아카데미] 험난할망정 영광스런 먼길

 

백산(白山)의 동지들

- 동암 서상일

 

 

 

1919년 겨울 서울 서대문 형무소, 추위에 코와 귀가 빨개진 일곱 살 난 여아(女兒)가 형무소 입구에서 도시락을 꺼내들고는 우리 아버지 점심식사가 식지 않게 빨리 넣어 주세요라며 애걸하고 있었다.

 

도시락에 무슨 비밀 쪽지라도 들어 있을까봐 도시락을 몇 번씩이나 뒤척여 보던 간수들은 조사를 마친 후 형무소 내 반입을 허락했다.

 

아버지 동암 서상일을 회상하며 기억의 강을 건너던 막내딸 태주(台珠, 76. 대구시 남구 대명 8201716)씨는 당시 3·1 운동에 가담해 내란죄로 복역 중이던 아버지에게 매일 사식을 갖다 주던 둘째 언니(貞珠, 당시 7)를 회상하며 잠시 말을 잊었다.

 

동암은 3·1운동과 관련해 복역한 것을 전후해 수차례에 걸쳐 일제에 의해 옥고를 치렀으며 해방 후에는 반독재, 혁신 정치에 발을 디디면서 이승만 정권에 의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해방 전에는 독립운동가 교육자로, 해방 후에는 진보적 정치가로 역정을 살아 온 동암은 188679일 대구시 달성동에서 서봉기(徐鳳基)3남으로 태어났다.

 

대구 달성학교를 거쳐 서울 유학 길에 오른 동암은 보성전문 법과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항일독립 운동의 길로 들어선다. 당시 보성전문 출신으로 서상일과 함께 계몽운동 계열의 독립운동을 편 인사로는 남형우(南亨祐) · 신백우(申伯雨), 신성모(申性模) 등이 있으며 안희제(安熙濟)1)는 보성 학교에 입학했다가 양정 학교를 졸업했다. 이들이 상경 유학한 시기는 대체로 1905년 이후 1910년까지였다.

 

특히 서상일과 남형우 · 안희제는 교남교육회2) 회원으로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 )3)에 함께 참여하며 독립 운동의 연락 및 자금 전달 역할을 담당한 백산(白山) 상회에 서로 긴밀히 연결돼 있었다.

 

일제의 한국합병이 기정 사실화된 191010월 동암은 교남교육회 계통의 남형우(단장) · 안희제(부단장, 2대 단장)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대동청년단을 결성한다.

 

동암은 험난할 망정 영광스런 먼길이란 글(신태양출판사, 연대 미상)에서 안중근 선생의 의거가 있을 무렵 나는 대동청년회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조국의 진정한 자주독립을 찾기 위해 중국 만주 노령 일본 등지를 돌아다녔다고 말하고 있다.

 

대동청년단이 비밀결사라는 것은 정확한 조직 날짜나 장소, 조직의 실체 등이 드러나지 않은데다 이름도 대동청년당, 대동청년회 등으로 혼용돼 불리고 있는 점으로 보아 잘 드러난다. 대동청년단 결성 후 동암은 백산과 함께 만주 망명길에 올라 1913년 귀국한다.

 

대동청년단은 결성 후 3~4년 동안 특별한 활동이 드러나지 않다가 동암과 백산이 만주 망명 후 귀국하는 1913년 이후 본격적인 국내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대동청년단은 국권회복운동의 국내외 연락거점으로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합병되던 해인 19109월 동암은 9인결사동맹(9(九人決死同盟)이라는 조직을 결성한다. 동암은 9인결사동맹이 당시 무력 외교만을 일삼고 있던 외국 정부에 우리 나라 청년들의 기백을 보여주고 서울에 주재하고 있는 9개국 공사(公使)를 상대로 한 · 일 합병을 규탄하는 선언문을 배부하고 할복 자살키로 돼 있었으나 사전에 탄로가 나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9인결사동맹이 대동청년단과 연계돼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일본의 한국 강점을 전후한 시기에 신교육을 받은 영남지역 계몽지식인들이 상업 활동을 통해 식민지적 상황을 타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신흥상업도시로 부상하는 대구로 모여들었다. 이들 청년지사는 계몽지식인의 모임인 달성친목회에 속속 가입한다.

 

달성친목회는 190895일 이근우(李根雨) 김용선(金容璇) 등의 발기에 의해 조직되었으나 한일합방과 함께 회원들이 모두 탈퇴하고 일본 관헌의 주목을 피해 자진 해산됐다. 그러나 달성친목회는 동암에 의해 3년만에 다시 결성돼 활발한 활동을 벌이며 이후 독립운동 단체인 조선국권회복단4)으로 재편된다.

 

19139월 하르빈에서 대구로 돌아온 동암은 청년 단체가 없어진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친목회 재조직에 나선다. 동암은 이근우 · 정운일(鄭雲馹) · 서창규(徐昌圭) · 서기수 등과 의논한 끝에 달성친목회를 다시 일으킨다.

 

달성친목회는 겉으로는 친목을 표방했지만 실제 조선 청년을 규합하고 암암리에 배일 사상을 고취하다 19159월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된다.

 

당시 달성친목회 회원은 4~5백 명에 달했으며 대표적인 회원으로는 서상일을 비롯 정운일 · 박상진 · 이시영 · 남형우 · 안확 등이 포함돼 있었다.

 

정운일은 19154월 조선국권회복단의 군자금모집 사건에 연루됐으며, 박상진은 의병대장 허위의 제자로 대한광복회5)를 조직한 인물이다. 우재 이시영(1882~1919, 독립운동가, 만주 망명 중 병사)은 이인(전 법무장관)의 숙부이며, 외아들(대구 원화여고 초대교장)은 후일 서상일의 사위가 된다.

 

만주에서 국내로 들어와 대동청년단과 달성친목회를 재건한 동암은 태궁상점을 설립한다.

 

태궁상점은 서상일이 부친의 친구 아들인 윤상태의 후원으로 설립한 것으로 처음 1천원의 자금으로 남문 안에서 곡물 및 숯장사를 시작해 1918년 봄 윤상태와 서창규의 보증으로 농공은행에서 1만원을 융통하여 확장하였다.

 

서상일은 안희제와 보성학교에서 인연을 맺은 뒤 교남교육회 대동청년단 활동을 같이 하면서 가까워졌으며 대구에서 백산상회의 주식모집에 협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백산상회에 근무하고 있던 남형우가 19187월과 19191월 두 차례 대구에 머물면서 주식모집의 일을 맡고 있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밀접해진다.

 

태궁상점은 이들이 중심이 돼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의 활동 거점으로서의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백산상회는 독립운동 자금공급과 연락처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서상일의 태궁상회(대구), 이수영의 미곡상(서울), 이해천의 해천양행(중국 봉천) 등 대구 서울 원산 인천을 비롯한 국내 18개소와 중국 안동 · 봉천 · 길림 등 중국 3개소에 지점 및 연락 사무소를 설치해 거점으로 활용했다.

 

주요 거점으로는 박상진의 상덕태상회(대구), 윤상태의 향산상회(왜관), 서상호의 미곡상(통영), 원흥상회(원산), 원동상회 및 환오상회(마산)가 서로 연결돼 있었다. 이들 곡물상은 대부분 조선국권회복단 거점 역할도 동시에 수행한다.

 

동암 서상일은 안희제와 함께 만주로 건너가 그 곳에서 김동삼 · 신채호 · 박상진 등 독립투사들과 교분을 가진다. 동암은 1910년부터 19139월까지 해외활동을 하면서 독립 운동에 관한 나름대로의 철학을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동암은 만주에서 귀국한 후 달성친목회(1913), 조선국권회복단(1915), 신조선(1918) 등의 계몽운동단체나 비밀결사를 재흥하거나 만들어 독립운동을 실행한다.

 

동암은 생전에 남긴 글에서 공자왈 맹자왈만 외우고 있던 내가 중국 만주 연해주 일본 등지를 방랑하면서 소위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고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를 들어보니 한심하기 짝이 없고힘이 있어야만 산다는 평범한 원리를 다시금 음미하게 되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1913년을 전후한 시기는 만주 독립운동이 커다란 전기를 맞이한 때였다. 흉작과 수토병의 유행으로 많은 이주민이 목숨을 잃는 등 내부적으로 운동이 난관에 봉착한데다 1911년 중국의 신해혁명6),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을 비롯한 세계 정세의 격변으로 독립에 대한 기대가 부풀던 시기였다.

 

특히 신해혁명은 중국으로 망명했던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동암은 신규식 · 조성환 · 박상진 등과 함께 신해혁명에 가담하거나 참관하면서 독립에 대한 열정을 높였으며 귀국 후 활발한 국내 활동을 전개한다.

 

1915115일 동암은 달성친목회 회원을 중심으로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한다. 동암을 중심으로 이시영 · 박영모 · 홍주일 등은 마침 윤창기가 요양을 위해 경북 달성군 안일암에 머무르고 있는 것을 계기로 모임을 갖는다. 시회를 가장한 이 회합에는 이들 외에도 정운일 · 윤상태 등이 참석, 비밀결사인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한다.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 후 4년이 지난 19196월 소위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조직 자체가 외부에 전혀 노출되지 않는다.

 

동암이 조선국권회복단 외교부장을, 대동청년단에서 같이 활동하던 윤상태가 총령을 맡는다. 교통부장에는 이시영 · 박영모 등이 각각 선임됐다. 이시영과 박영모는 동암과 함께 달성친목회 회원으로 활동한 지우였다.

 

해외 애국단체와 지사 및 국내 동지들과의 연락, 독립운동 자금조달 등을 통해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조선국권회복단은 1919년 동지 정진영의 밀고로 연루된 28명 중 동암을 포함, 윤상태 · 서상환 · 서상호 · 신상태 등 13명이 체포된다.

 

이 사건이 소위 대구 28인 사건이라 불리는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사건이다. 체포된 인사들은 제령 위반죄로 종로경찰서에서 갖은 고문을 당한 끝에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다. 이들은 1920년 재판에 회부돼 경성복심법원에서 23개월에 걸쳐 예심절차를 거치나 단서가 나타나지 않자 법원에서 풀려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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