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아카데미 24] 퇴행의 시대 속으로

엘리트주의에 물든 86세대 노동자들의 ‘각자도생’

충북청년신문 | 기사입력 2020/10/15 [16:09]

[청년 아카데미 24] 퇴행의 시대 속으로

엘리트주의에 물든 86세대 노동자들의 ‘각자도생’

충북청년신문 | 입력 : 2020/10/15 [16:09]

 

 [청년 아카데미 24] 퇴행의 시대 속으로

 

  

 엘리트주의에 물든 86세대 노동자들의 각자도생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신자유주의가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지배 원리가 되었다. 그 결과는 사회적 양극화와 불평등 심화였다. 이는 누구나 경험해온 바이기에 더 이상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문제는 그 여파가 일시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구조화되고 장기화되었다는데 있다.

 

외환위기를 계기로 한 산자유주의 상륙은 과거 군사쿠데타 못지않은 경제 쿠데타였다. 마땅히 5·18광주민주화운동이나 6월 민주항쟁과 같은 강력한 시민 리더십을 발휘하는 과정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시민 리더십은 발휘되지 않았다. 시민주의는 외환위기 이후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 가까이 거의 실종되다시피 했다. 5·18광주민주화 운동이 던진 두려워 말고 독재에 맞서 싸워라”, 6월 민주항쟁이 던진 자신감 갖고 세상을 바꾸어나가라처럼 일관되게 시민들의 가슴을 달굴 만한 메시지도 없었다.

외환위기는 중대 사건을 겪으면서 시민주의가 실종된 것은 한국 현대사에서 커다란 의문 부호를 남기는 지점이다.

 

잠재력 측면에서 보자면 신자유주의에 맞서 시민 리더십이 발휘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했다. 외환위기가 발생하기 얼마 전 민주노총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차원에서 김영삼 정부가 추진한 노동법 개악을 막아낸 적이 있었다. 노동계는 신자유주의의 방어벽이 되기에 충분한 힘을 갖고 있었다. ‘노사모로 표현된 시민 주체의 정치운동은 노무현 정부 탄생으로 기존 질서를 뒤바꾸어 놓을 만큼 놀라운 파괴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이 모든 잠재력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한 채 사장되었다.

 

강력한 흐름을 형성했던 시민주의가 실종된 원인은 무엇일까? 우선 두 가지 직접적인 원인이 있다.

 

먼저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미친 영향을 꼽을 수 있다. 시민주의의 흐름을 주도적으로 이끌던 사람들 중 상당수는 김대중 · 노무현 지지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 정부는 신자유주의를 대안으로 인식하고 적극 추종했다. 김대중 · 노무현 정부 정책 방향이 시민주의의 향배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부 정책에 맞서 시민주의가 저항할 가능성은 아무래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노동운동 활동가들의 취약했던 인식 수준을 들 수 있다.

신자유주의가 집중적 공격 대상으로 삼은 것은 노동자들이었다. 노동자들은 금융자본 이익 극대화를 위한 재물이었다. 신자유주의가 구조조정을 일상적으로 압박한 것은 이를 입증한다. 신자쥬주의의 대척점에 서야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노동계였다.

노동계는 신자유주의 상륙을 막아낼 마지막 방어벽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노동계의 방어벽은 너무 쉽게 무너졌다. 외환위기 다음 해인 1998년 초 민주노총을 포함한 노동자 단체와 사용자 단체, 정부 대표들이 참여하는 노사정위원회가 개최되었다. 노사정위원회는 정리해고 도입과 파견법 제정 등 노동시장 유연화 법제화에 합의하였다. 비정규직 양산을 뒷받침하는 법 장치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민주노총은 대의원대회를 소집해 이를 추인했다. 민주노총은 그 대가로 민주노총 및 전교조 합법화, 노동조합 정치활동 보장 등의 양보를 얻어냈다.

 

많은 금융기관과 기업들이 외환위기를 계기로 대규모로 부실화된 상태였다. 이를 수습하자면 구조조정이 상당 전도 불가피했던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 부정적 영향이 파괴적 수준에 이르렀던 사항들을 이렇게 졸속 합의 처리한 것은 분명 문제가 있었다. 타협이 불가피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관련 입법을 일정 기간만 적용하는 한시법으로 못 박고 그사이 보다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기로 했어야 했다. 1998년 초 노동계의 선택은 타협이 아니라 명백한 백기 투항이었다. 민주노총이 합의 대가로 얻어낸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의 일부였을 뿐이다.

 

노동계의 투항은 당시 관련 활동가들의 수준을 액면 그대로 보여주었다. 노동운동 활동가들은 외환위기가 어떤 맥락에서 발생했고 노동시장 유연화가 궁극적으로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등에 대해 제대로 꿰뚫고 있지 못했다. 그들은 막연한 공포의 포로가 되어 자신의 본분을 망각했다.

 

노동운동은 6월 민주항쟁 여파로 활성화된 시민사회 운동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힘을 행사하던 분야였다. 그런 노동운동이 신자유주의 공세 앞에 백기 투항했다. 시민주의 향배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이상 외환위기 이후 시민주의 실종에 영향을 미친 두 가지 요인을 살펴보았다. 매우 중요한 요인이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걸 설명 할 수는 없다. 시민주의의 본질은 권력기관이나 (부분적으로는 활동가를 포함하는) 엘리트 집단의 판단과 무관하게 시민들 스스로 역사의 무대에 진출해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6월 민주항쟁 이후 폭발적으로 활성화된 시민사회운동은 매우 높은 수준에서 시민 주체들을 훈련시켰다. 이들 시민 주체들은 외환위기를 맞이해 시민 리더십을 발휘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런데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이유는 무엇일까?

 

한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외환위기가 시민 주체의 교체가 일어나는 과도기에 발생했다는 가설이다. 요컨대 기존 시민 주체가 엘리트주의에 오염되어 기득권 세력에 가까웠지만 새로운 시민 주체가 등장하지 않은 상태에서 외환위기가 터졌을 가능성이 있다. 시민 리더십 발휘가 객관적으로 어려울 수 있었던 것이다.

 

기존 시민 주체가 정말로 기득권 세력에 가까워졌는지 여부에 판단하는 것은 상당히 주의를 요구한다. 이를 뒷받침할 객관적 자료가 명확히 정리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칫하면 싸잡아 매도하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느 정도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 조금은 고통스러운 이야기지만 내가 속해 있는 ‘86세대 프리즘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엘리트주의에 물든 86세대

 

86세대의 최초 명칭은 386세대였다. 1960년대에 출생했고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으며 30대에 왕성한 사회 활동을 해온 민주화운동 출신자들을 아우르는 명칭이다. 이후 나이를 먹으면서 486세대 혹은 586세대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통칭 86세대로 불리고 있다.

 

86세대는 우리 역사에서 매우 독특한 존재이다. 86세대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하는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으며 그 성과를 가장 크게 누려온 세대이다. 처음으로 의미심장한 승리를 경험한 세대이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86세대는 그 어떤 세대보다도 강한 자부심을 품고 살아왔다. 기회가 있으면 왕년에 한 가닥 했음을 내비치는 게 이들 세대의 공통점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86세대가 추억 속에 간직하고 있는 과거 모습과 민주화 투쟁 승리 이후 살아온 모습은 크게 달랐다. 과연 86세대가 민주화투쟁 승리 이후 어떤 궤적을 그렸는지 최대한 비판적 입장에서 살펴보자.

 

1987년 민주화투쟁 승리로 국면이 바뀌자 86세대 다수는 저항의 시대에서 점령의 시대로 코드를 전환했다. 이후 86세대 다수를 지배한 것은 이른바 고지론이었다. 고지는 기존 질서 안에 존재하는 상층부였다. 자신이 지위를 갖고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그 고지를 점령하면 원하는 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물불 안 가리고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서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점령을 위한 사투 과정에서 86세대는 시민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갔다. 그들이 더욱 믿고 의지한 것은 시민이 아니라 지위와 권력 그리고 돈이었다. 여기에 자기 능력을 더하면 세상을 바꿀 힘이 나올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점령 과정에서 기존 문법만을 따라하며 그나마 품고 있던 상상력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정작 원했던 자리에 올라섰을 때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위와 권력, 돈에 자신의 능력까지 결합시키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엘리트주의의 전형이었다. 한때 518광주시민의 리더십에 자신을 의탁하면서 엘리트주의에 거리에 두었던 86세대 다수는 그런 식으로 엘리트주의에 오염되어 갔다. 과거 자신들이 귀의했던 시민주의를 등진 것이다.

 

86세대가 엘리트주의에 오염되었음은 엘리트주의를 가장 경계해야 할 진보정당운동에서 한층 적나라하게 드러났다(진보정당이라는 표현이 적합한지 문제제기가 있을 수 있으나 통상적인 표현이기에 그대로 쓴다).

 

(86세대가 주축이 된) 진보정당운동을 지배한 흐름 역시 개인과 그룹 역시 개인과 그룹의 권력 추구가 모든 것을 규정하고 지배하는 엘리트주의였다. 나 혹은 우리 그룹만이 옳고 우리가 권력을 잡아야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오만과 독선이 팽배했다. 가장 우선해야 할 시민의 단결과 정치적 진출은 쉽게 무시되거나 훼손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지도력, 조직성, 사상과 노선의 이름 아래 철저히 정당화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진보정당 주역들의 사고 속에는 그룹 갈등 구도만 남고 시민의 존재는 지워졌다.

 

기억하기조차 싫은 한 사건은 이 모든 것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2012년 통합진보당은 국회의원 비례후보 경선을 둘러싼 부정 시비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누가 부정을 저질렀든 관계없이 그것은 당 내부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당 지도부는 지도부와 당원, 당과 유권자의 관계에서 이 문제를 해명하고 사과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당 지도부와 일부 대열은 정치 그룹 간 갈등 문제로 차환하고 대응했다. 급기야 사태는 중앙위원회에서 폭력이 난무하는 최악의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개인과 그룹의 권력 추구가 철저히 우선되면서 진보정당은 끊임없는 갈등과 내분에 휩싸였고 분당과 통합을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진보정당을 지지하던 시민들은 갈기갈기 찢겨졌다. 노동현장은 분열로 황폐화되었다. 진보정당운동이 핵심 동력으로 간주했던 노동자 정치 세력화는 노동계의 정치적 해체로 귀결되었다.

 

86세대는 저마다의 위치에서 영향력을 키워갔다. 영향력을 발휘하는 만큼 더 많은 권력을 균점했다. 어느 순간 86세대는 정치권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권력의 맛은 달콤했다. 86세대는 권력에 취해 가랑비에 옷 젖듯이 기득권에 포섭되어 갔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출범은 이 점에서 결정적 전환기가 되었다.

 

기득권에 포섭되면서 86세대는 신자유주의에 오염된 기존 질서를 바꾸기보다는 그 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더욱 익숙해져 갔다. 갈수록 권력과 돈, 자리에 연연하는 속물로 변해갔다. 문재인 정부 고위 공직자 재산 내역은 그 일단을 보여 주었다. 자리를 탐하고 재산 불리기에 집착한 사람들이 신자유주의 문제에 대해 고민해본들 얼마나 할 수 있겠는가?

 

민주화투쟁 승리 이후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86세대 대부분이 승리의 과실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너도나도 내가 저 자리를 차지하면 세상은 달라질 것이라는 엘리트주의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그 자신은 끝내 기득권 세력에 포섭되면서 진정으로 세상을 바꿀 존재인 시민들을 아웃사이더로 밀어냈다.

 

모든 기득권은 희생양을 낳기 마련이다. 86세대가 기존 질서 안에서 기득권을 향유하고 있는 사이 그 맞은편에 덤터기를 뒤집어쓴 청년 세대가 고통스런 신음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청년 세대는 일자리에서 뚜렷한 소외를 겪었다. 단적으로 15~29세 청년 고용률은 40% 수준에 머물렀다. 청년 10명 중 6명이 백수 신세였던 것이다. 어렵사리 취업을 해도 다수가 비정규직으로 흘러들어갔다. 이렇듯 청년 세대가 체제의 희생양이 된 것은 우리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부모가 비정규직이고 자녀가 정규직이라면 그 가정은 나름대로 희망을 품고 살 수 있다. 반대로 부모가 정규직인데 자녀가 비정규직이라면 그 가정은 희망을 갖기 어렵다. 외환위기를 겪은 한국 사회는 바로 후자의 사례가 되었다.

 

86세대는 자신보다 못한 삶의 조건을 후대에게 물려준 최초의 세대라는 불명예를 안을 가능성이 매우 커졌다. 우리 역사상 가장 성공한 세대에서 가장 실패한 세대로 전락할 수 있는 것이다. 86세대 프리즘은 기존 시민 주체들 다수가 엘리트주의에 물들면서 기득권 세력으로 전락해갔음을 강하게 암시해준다. 그 결과 외환위기 이후 시민 리더십이 발휘되지 못했고 시민주의가 끝내 실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엘리트주의는 시민주의를 파괴할 가능성이 있으며 둘은 쉽게 양립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엘리트주의는 시민주의의 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시민주의가 엘리트 자체를 배격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시민주의가 경계하는 것은 엘리트주의이지 엘리트 자체가 아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소수이지만 외환위기 이후에도 시민주의에 충실하고자 노력한 엘리트들이 존재했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여러 활동가, 전문가, 오피니언 리더들이 시민주의 가치 실현에 헌신했고 그들의 삶은 충분히 조명받아야 한다.

 

노동자들의 각자도생

 

외환위기 이후 시민주의가 실종되면서 공통의 가치와 목표를 지향하는 흐름도 크게 퇴색했다. 이 시기 사람들을 지배한 것은 518광주민주화운동 이후 부채의식도, 6월 민주항쟁 이후 자신감과 열정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일부 민주시민 사이에 남아 있던 부채의식도 노무현 정부 출범과 함께 완전히 사라졌다. 이러한 조건에서 사람들을 움직였던 힘은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각자의 이익이었다. 한국 사회는 액면 그대로 각자의 이익을 우선하는 시대에 들어섰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의 지배 원리로 등장한 신자유주의는 돈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함과 동시에 개인의 자유로운 이익 추구를 적극 웅호했다. 한국 사회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신자유주의 사상에 길들여져 갔다. 일시에 돈 바람이 불었다. 사람들은 만났다 하면 돈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너도나도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정보를 갈구하면서 재테크 관련 책들이 버젓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노동의 가치를 옹호하고 개인을 넘어 집단 연대를 추구해야 할 노동자들이 역시 이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98년 노사정위원회 합의로 정리해고가 합법적 지위를 얻자 곧바로 정리해고 칼바람이 거세게 불어 닥쳤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이 자신을 끝까지 보호해줄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들 입장에서 궁극적으로 자기를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었다.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나부터 살고보자는 심리가 빠르게 확산되었다. 그들은 만약에 있을 지도 모를 정리해고에 대비해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노동자들은 잔업 철야 시간을 늘려가면서까지 생존의 아귀다툼을 벌였고, 일부 사업장에서는 일감을 놓고 다투는 현상마저 나타났다.

 

789월 노동자 대투쟁 이후 몇 년 동안 대기업 노동자들의 투쟁은 노동자 전체 이익을 증대시키는 데 기여했다. 대기업 노동자들 투쟁을 지켜본 중소기업 사용자들이 쟁의 예방을 위해 알아서 자사 노동자들의 처우를 개선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사정은 판이하게 달랐다.

 

노동계 주력으로 등장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전체 노동자의 보편적 이익보다는 자신들의 이익 증대에 집중했다. 노동조합 또한 눈앞 이익 추구에 충실했고, 조합원의 배타적 이익 추구를 위한 도구로 기능했다. 그 결과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평균 소득은 중상류층 수준에 올라설 수 있었다. 상당 정도는 노동자 내부의 심각한 불균등으로 이루어진 결과였다. 노조 조직률이 2%에 불과한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대기업 이익 증대의 희생양으로 전략했다. 임금 수준은 대기업 노동자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심각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는 1998년 노사정위원회 합의에 직접적 책임이 있다. 그런 노조는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는 조건에서도 대체로 잘 나갔다. 반면 노사정위원회 합의에 전혀 책임이 없는 중소기업 노동자들과 청년들은 철저한 희생양으로 전략했다. 노동운동이 가장 앞장서서 옹호해야 할 사회 정의의 원칙을 스스로 심각하게 훼손한 것이다.

 

각자의 이익을 우선하는 현상 일반에 대해 마냥 도덕적 잣대로 비난할 수만은 없다.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무조건적인 자기희생을 요구했던 시대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찾아나가는 정상화 과정의 일부일 수도 있다.

 

문제는 외환위기 이후 각자의 이익 추구가 사회적 불평등 심화와 청년 세대 소외 증가와 깊숙이 맞물려 진행되었다는 데 있다. 애덤 그미스Adam Smith가 기대했던 각자의 이익 추구가 모두의 이익 증대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회가 강자의 약자로 확연히 갈라져 있는 조건에서 각자의 이익 추구는 사회적 약자를 희생양으로 만들기 쉬웠다. 문제는 약육강식의 사회 구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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