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아카데미 23] 전두환 정권은 자기 무덤을 팠다.

부채의식의 연쇄사슬, 민주화 대장정

충북청년신문 | 기사입력 2020/10/15 [15:27]

[청년 아카데미 23] 전두환 정권은 자기 무덤을 팠다.

부채의식의 연쇄사슬, 민주화 대장정

충북청년신문 | 입력 : 2020/10/15 [15:27]

 

[청년 아카데미 23] 전두환 정권은 자기 무덤을 팠다.

 

 

부채의식의 연쇄사슬, 민주화 대장정

 

 

 

민주화세력이 요구한 직선제 개헌을 포기하고 군사쿠데타 주역인 노태우에게 권좌를 넘겨주려고 획책했다. 분노한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6월 민주항재의 막이 오른 것이다.

 

전두환 정권은 군부대를 투입해 시위를 진압하기로 마음먹었다.

619일 오전 1030분 청와대 군 고위관계자 회의에서 전두환은 다음날 새벽 4시까지 군부대가 작전 지역으로 이동할 것을 지시했다.

시민들은 조만간 군부대가 투입될 것임을 즉시 간파했다. 긴장이 감도는 바로 그 순간 부산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치고 나갔다. 당시 부산 시민들을 움직인 것 역시 부채의식이었다.

 

부산 시민들은 1979년 부마항쟁으로 박정희 정권 몰락을 주도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에는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침묵을 지킨 것에 대한 남다른 부채의식이 있었다. 6월 민주항쟁 기간 다수 시민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으레 광주에서 피 흘리며 싸울 때 침묵한 것에 대한 부채를 이번에 반드시 갚자는 발언이 쏟아졌다. 그때마다 뜨거운 환호 소리가 울려 퍼졌다.

 

618일 부산시내는 계엄령설이 파다하게 퍼져 있는 가운데 군용 헬기까지 상공을 배회하는 등 극도의 긴장감이 휩쓸고 있었다. 긴박한 상황에서 가톨릭센터 농성 학생들이 비장한 각오로 휘발유통을 들고 옥상 위로 올라가 군부대가 투입되면 분신할 것임을 선언했다.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수십만 시민들이 몰려들어 학생들을 지키자며 주면 도로를 가득 메운 채 시위를 계속했다.

 

부산에서 불붙은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거센 시위 물결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광주의 전국화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전국 어디든지 시민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울 각오가 되어 있었다. 전두환 정권은 군부대 투입을 포기하고 두 손 들고 말았다. 전두환 정권은 직선제 개헌 등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했다.

 

민주화 대장정은 온갖 고난을 무릅쓴 끝에 승리의 봉우리에 올라섰다. 198779100만여 명의 시민이 참여한 가운데 시위 중 사망한 이한열 학생의 장례를 치르는 것으로 6월 민주항쟁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자신감과 열정, 시민사회운동의 폭발 (p153~p158)

 

 

6월 민주항쟁의 승리는 시민사회운동의 폭발적 상징으로 이어졌다. 여기에는 일정한 필연성이 작용했다.

 

민주화 대장정 시기에는 모든 힘을 민주화에 집중하면서 다른 이슈는 유보되거나 억제되었다. 민주화 대장정 승리와 함께 다양한 요구를 자유롭게 분출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민주화 자체가 그럴 수 있는 보다 자유로운 공간을 제공하기도 했다. 보다 중요한 점은 시민들의 의식 변화였다. 민주화 대장정이 승리하면서 시민 의식은 혁명적 변화를 겪었다. 시민들은 군사독재와의 맞대결에서 승리한 경험을 통해 자신들이 지닌 무한한 잠재력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봐야 계란으로 바위 치기 아니냐며 민주화 투쟁에 냉소를 보이던 사람들조차 태도를 바꾸었다.

 

시민들은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여기기 시작했다. 역사의 무대 한복판에 진출해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보겠다는 자신감과 열정으로 넘쳐났다. 가장 즉각적으로 진출한 사람은 노동자들이었다.

 

6월 민주항쟁 이전 노동자들은 대체적으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고, 주면 주는 대로 받는 순응과 체념의 삶을 살고 있었다. 1984년에서 1985년까지 서울 구로공단 등에서 민주노조가 출현하기도 했으나 전두환 정권 탄압으로 모두 파괴되었다. 노동자들은 더욱 깊은 패배의식에 빠져들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지켜본 학생운동 출신 노동운동가들은 앞으로 상당 시간 한국에서 합법적인 노조운동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그러던 노동자들이 일순간에 달라졌다.

 

6월 민주항쟁의 열기가 채 식기도 전인 7월부터 노동자들은 약속이라고 한 듯이 일제히 투쟁 속에 돌입했다. 789월 노동자 대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투쟁은 한 점 불꽃만 튀기면 일거에 폭발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투쟁의 불길은 대표적인 공업 도시인 울산을 일거에 뒤덮었고 순식간에 부산, 거제, 마산, 창원 일원으로 번져나갔다. 서울, 인천, 부천, 안양, 성남 등 수도권 역시 노동자 대투쟁의 불길 속에 휩싸여갔다. 업종별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제조업을 포함해 운수업, 광업, 사무직, 판매, 서비스직에서 의료 등 전문직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확산되었다. 액면 그대로 지역과 업종을 두루 망라한 전국적 투쟁이었다.

 

3개월에 이르는 투쟁 기간 동안 새롭게 결성된 노동조합은 자그만치 1,060개에 이르렀다. 지난 1980년대부터 1986년까지 만들어진 노동조합의 수를 훨씬 뛰어넘었다. 불과 1년 전에 있었던 학생운동 출신 노동운동가들의 비관적인 전방을 일거에 뒤덮은 것이다. 아울러 대투쟁 기간 동안 발생한 노동쟁의 건수는 3,458건으로 하루 평균 40여 건씩 터져 나온 셈이었다. 1986년 하루 평균 0.76건에 비해 무려 50배나 증가한 것이었다. 가히 봇물 터지는 기세였다고 할 수 있다.

 

한번 달아오른 노동자 투쟁의 열기는 쉬이 식지 않았다. 1988년 한 해 동안 임금인상투쟁의 물결 속에서 2,000여 개의 신규 노조가 결성되었다. 폭발적으로 증가한 노동조합은 지역, 업종, 그룹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연대를 강화해나갔다. 이러한 노력은 1995년 산업별 조직과 지역본부 체계를 갖춘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KCTU) 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마냥 무시당하던 노동자들이 한국 사회에서 어느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한 축으로 등장한 것이다.

 

유사한 흐름이 다양한 영역에서 폭발적으로 진행되었다. 시골 촌놈이라고 무시 받던 농민들은 농민회 조직 결성으로 자존심을 마냥 드높였다. 늘 이등시민 취급받던 여성들의 적극 참여로 여성단체 활동이 비약적 발전을 거듭했다. 각종 의제를 중심으로 한 시민운동도 빠르게 활성화됐다. 과거 사치스런 의제로 취급받던 환경 문제도 시민들 사이에서 주요한 관심사로 떠올랐다.

 

1991314일 구미 두산전자 공장에서 페놀 30톤이 낙동강으로 흘러들었다. 영남 지역이 발칵 뒤집어졌다. 환경단체들은 맹렬한 활동을 전개했다. 환경단체 활동이 미친 영향이 매우 컸다. 업계 부동의 1위였던 두산그룹 계열사 맥주는 일거에 추락했다. 과거 상상도 못했던 생수 판매가 본격화되는 등 생활 문화가 달라졌다.

 

여성단체들은 전통과 관습이라는 이름 아래 남성 중심 가부장제를 구조화하고 성차별을 제도화했던 호주제 폐지를 위해 끈질긴 투쟁을 전개했다. 유림을 위시한 보수적인 사회 흐름이 거세게 저항했다. 하지만 여성들의 투쟁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2005년 국회에서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한 민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1953년 첫 개정안을 낸 지 무려 52년 만에 거둔 귀중한 승리였다.

 

시민사회운동의 힘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준 곳은 노동계였다. 민주노총이 정부와의 맞대결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61226일 새벽, 여당인 신한국당이 단독으로 개악된 노동법과 안기부법을 날치기로 통과시키는 사태가 발생했다. 개악된 노동법은 정리해고제 도입, 동일사업장 내 대체 근로와 신규 하도급 허용 등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다.

 

민주노총은 즉각 총파업으로 응수했다. 민주노총 총파업 투쟁은 1997118일까지 23일 동안 지속되었다. 모두 528개 노조 403,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한 번 이상 파업에 참가했다. 민주노총 총파업투쟁에 발맞춰 전국적으로 20개 이상 지역에서 집회가 연일 개최되었고, 참여 연인원은 100만 명이 넘었다. 총파업투쟁에 대한 각계 지지도 잇달았다. 자체적인 여론 조사 결과로는 70% 이상의 국민이 민주노총 총파업투쟁을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궁지에 몰린 김영삼 정부는 백기를 들었다. 날치기는 무효화되었고 민주노총 간부에 대한 검거령도 모두 취소되었다. 민주노총은 일약 세계 노동운동계의 영웅으로 부상했다. 민주노총의 이니셜인 ‘KCTU’는 승리를 상징하는 로고가 되었다.

 

시민사회운동이 크게 성장하면서 소수가 독점했던 권력은 사회 여러 영역으로 분산되었다. 시민사회운동은 사회 권력이라는 새로운 이름의 권력 행사 주체가 되었다. 더 이상 그들은 역사라는 무대의 관객에 머물지 않았다. 그들을 지배한 것은 자신감과 열정이었다. 영향력이 커질수록 권력 또한 커지며 그들은 자신의 존재감을 더욱 뚜렷이 표현해나갔다.

 

5·18광주민주화운동에서 6월 민주항쟁을 거쳐 노동자 대투쟁과 각종 시민사회운동의 성장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는 시민주의가 승리를 구가하며 꽃을 피우는 시절을 맞이했다. 우리는 이 역사적 사건들에서 세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모든 투쟁은 시민들의 자발적 판단과 선택, 결심이 만들어낸 역사였다. 전체 과정을 기획하고 이끈 소수 엘리트 집단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만약 소수 엘리트 집단이 기획해서 이끈 결과라고 간주한다면 엄청난 모독이 될 것이다. 부분적으로 활동가들이 의미 있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지만 시민의 자발적 진출을 돕는 정도에 그쳤을 뿐이다.

 

둘째, 결정적 순간마다 시민들은 시대의 과제를 담은 메시지를 던짐으로써 높은 리더십을 발휘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이 던진 메시지는 두려워 말고 독재에 맞서 싸워라였다. 가장 적극적으로 반응한 측이 학생운동이었으며 이후 민주화 세력 전체가 이를 가슴으로 받아 안았다. 6월 민주항쟁이 던진 메시지는 자신감을 갖고 세상을 바꾸어나가라였다. 역시 적극적으로 반응한 측은 노동자들이었으며 이후 시민사회운동 전체가 그 메시지를 가슴 깊이 품었다.

 

셋째, 일련의 국면을 거치며 시민 스스로 보다 높은 단계로 발전해갔다. 19604월 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던 시민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5·16군사쿠데타 앞에서는 저항을 포기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군부세력에 맞서 저항했다.

 

하지만 당시 광주는 다른 지역들에게서 멀리 떨어지고 고립된 채 외로운 투쟁을 이어가야 했다. 6월 민주항쟁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5·18광주의 정신을 계승함과 동시에 지역적 고립을 완전히 극복했다. 이처럼 시민들은 중요한 순간마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깨닫고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며 세상을 바꾸어가는 능동적 주체로 성장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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