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아카데미 22] 승리를 일군 시민주의

시민 리더십의 폭발, 5‧18광주, 시민군은 계엄군을 시내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광주는 ‘해방’되었다.

충북청년신문 | 기사입력 2020/10/13 [15:36]

[청년아카데미 22] 승리를 일군 시민주의

시민 리더십의 폭발, 5‧18광주, 시민군은 계엄군을 시내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광주는 ‘해방’되었다.

충북청년신문 | 입력 : 2020/10/13 [15:36]

  

[청년아카데미 22] 승리를 일군 시민주의

 

여기, 한국현대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리더십을 발휘한 존재가 있다. 그 어떤 뛰어난 지도자나 그룹도 그보다 위대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수십만, 어쩌면 수백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그의 리더십 아래 자신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를 깨달았다. 일상적으로 어떤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지를 알았고, 그 과제의 수행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또한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지도 깨달았다. 때로는 죽음도 불사해야 할 만큼 고난이 뒤따랐으나 기꺼이 감수했다.

 

그 위대한 존재는 518광주시민이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주역이었던 이들 시민만큼 한국현대사의 고비에서 강력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리더십을 발휘한 존재를 그 어디에서 찾아 볼 수 있겠는가?

 

한국전쟁 이후 길고 긴 인고의 세월이 있었다. 19604월 혁명을 통해 분출했던 시민의 힘은 이어지는 516군사쿠데타로 짓이겨졌다. 박정희 정권 18년을 거치면서 시민들은 시련 속에서 혹독하게 단련되었다. 시민주의가 무르익는 과정이었다. 시민의 역량은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일거에 지형을 바꾸어낼 수준으로 숙성되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그 폭발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의 이야기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다.

 

 

시민 리더십의 폭발, 518광주

 

시민군은 계엄군을 시내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광주는 해방되었다.

 

 

2017년 기준으로 볼 때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지금의 20~30대 대부분이 태어나기 전에 일어난 일이다. 꽤 오래전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될 수밖에 없다. 독자들 중에는 처음 접하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먼저 이런 의문이 들 것이다. 왜 하필 다른 곳도 아닌 광주라는 도시에서 그런 항쟁이 일어났을까?

 

518광주민주화운동은 독재에 대한 항거였고 민주화 열망이 분출된 과정이었다. 그렇다면 광주 시민은 그 어느 곳보다 독재 정권의 억압과 차별을 더 절실하게 느끼고 더 큰 분노를 품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결정적 실마리를 제공해준 것은 박정희 정권의 노골적인 호남 차별이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영남과 호남 지역은 특별한 갈등 관계에 있지 않았다. 투표 성향도 비슷했다. 비극은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영남출신인 공화당 후보 박정희와 호남 출신인 신민당 후보 김대중이 맞대결을 벌이면서 시작됐다. 당시 박정희 진영은 상당히 수세에 몰려 있었다. 전세를 뒤집기 위해 꺼내든 카드가 바로 지역대결 구도였다. 영남 지역의 인구수가 두 배 이상 많은 점을 이용한 것이다.

 

1970년 대통령 선거를 계기로 박정희 정권은 지역대결 구도에 더욱 빠져들었다. 지역대결 구도가 유지되면 다수를 차지하는 영남지역이 정권을 안정적으로 뒷받침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호남 지역과 영남 지역에 대한 편 가르기가 시작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영남 지역을 기득권 세력으로 만들기 위해 호남 지역에 대한 차별을 노골화했다. 산업화 과정에서 영남 지역은 크게 혜택을 받은 반면 호남 지역은 소외되었다. 영남 출신은 행정기관과 기업 채용, 승진에서 여러모로 우대받은 반면 호남 사람들은 실력과 무관하게 차별받았다. 그런 식으로 곳곳에서 차별이 구조화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호남 지역 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해 호남 사람들의 인간성에 대한 왜곡된 논리를 만들어냈다. 전라도 사람들은 겉 다르고 속 다르며 뒤끝이 안 좋기 때문에 함부로 믿고 맡기면 안 된다는 식이었다. 이런 논리가 시중에 유포되자 타 지역에서는 호남 사람이라면 세도 놓지 않을 만큼 불신하고 경계하는 풍조가 만연했다. 군대에서마저 호남 출신은 집중적인 학대 대상이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지역 차별이 갖는 남다른 특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즘은 상황이 크게 달라졌지만 1970년대만 해도 성 차별과 계급 차별에 대해 상당수 사람들이 숙명처럼 여기고 감내하는 경향이 있었다. 여자로 태어난 게 죄이고 못 배우고 가진 게 없어 당하는데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며 체념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역 차별에 대한 반응은 달랐다. 도대체 호남 지역이 뭐가 부족하고 못나서 차별받아야 한단 말인가?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었고 아무리 애를 써도 수긍할 수 없는 처사였다. 더욱이 누가 무슨 의도로 그런 차별을 조장하고 있는지가 선명히 드러나 있지 않은가?

 

호남 지역 차별은 박정희 정권 이후 군사독재가 빚어낸 억압과 차별 중에서도 가장 저열하고 악랄했다. 차별이 가해지는 만큼 그에 비례해서 분노가 축적될 수밖에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게다가 배출구가 달리 없는 조건에서 장시간 축적된 분노는 일시에 거대한 폭발을 일으킬 가능성이 매우 컸다.

 

광주는 호남의 심장부이자 호남의 한이 응축된 도시였다. 바로 그러한 광주에 운명의 순간이 다가왔다.

 

19805, 전국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정치권은 신군부의 권력 찬탈 음모를 저지하지 못한 채 각개격파 당했다. 서울역 광장 일대를 메웠던 대규모 학생 시위대는 자진 철수 결정으로 대열이 무너져 있었다. 신군부는 517군사쿠데타를 단행하여 일거에 정국을 장악했다. 모든 저항은 봉쇄되었다.

 

518.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일단의 광주 지역 대학생들이 전남대, 조선대 등 소속 대학 정문 앞으로 모여들었다. 계엄령이 떨어지면 각 대학 정문 앞에 집결하기로 한 애초 약속에 따른 것이다. 휴교령과 함께 대학 정문은 굳게 닫혔으며 계엄군이 그 앞을 지키고 있었다. 학생들은 일제히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부터 광주민주화운동의 서막이 오르기 시작했다. 계엄군은 학생들에게 달려들어 개머리판을 내리치며 폭력을 휘둘렀다. 학생들은 굴하지 않고 도심으로 이동,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이윽고 더 많은 학생들이 가세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그렇게 통상적인 수준의 학생시위로 시작되었다.

 

사태를 결정적으로 악화시킨 것은 계엄군의 무자비한 유혈 진압이었다. 신군부는 광주 시위를 방치할 경우 저항이 전국으로 확산될 것이 틀림없다고 보았다. 그들은 이에 대비해 계엄군 이름 아래 살인무기를 지닌 7공수여단을 광주에 투입해 놓은 상태였다. 신군부는 최고수준 강경진압 방침을 내렸다.

 

7공수여단은 피에 굶주린 늑대처럼 31조가 되어 닥치는 대로 폭력을 휘둘렀다. 공수부대원들은 학생과 시민들을 연행해 끌고 가다가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기색이 있으면 소총에 꽂힌 대검으로 찔러버렸다. 곳곳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공수부대의 만행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갔다. 급기야 사망자들이 속출했다.

 

계엄군의 야수 같은 진압으로 광주 시내는 일시에 아수라장으로 돌변했다. 처음에 시민들은 불안한 시선으로 사태를 지켜보았다. 하지만 마냥 좌시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대로 두면 군인들이 학생들을 다 죽일 것만 같은 위기감이 들었다. 분노한 시민들이 대거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다.

 

520. 시내 곳곳에서 공수부대와 시민들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시민들은 각목, 쇠파이프, , 연탄집게, 식칼, 화염병 등 무기가 될 만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손에 쥐고 있었다. 관망 자세를 취하던 시민들도 자신감을 갖고 합세했다. 휴교령이 내려진 고등학생들도 대거 시위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521. 10만여 명의 시민들이 계엄군이 머물고 있는 도청 앞 금남로에 집결해 항의 집회를 개최했다. 오후 1시 느닷없이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때맞추어 계엄군은 일제히 엎드려쏴 자세를 취했다. 계엄군은 밀집해 있는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다. 금남로 일대는 일시에 피바다를 이루었다. 거리는 적막에 뒤덮였고, 죽은 사람의 피와 부상자들의 신음만이 금남로의 공백을 메웠다. 아우성치는 부상자들을 구하기 위해 시민들이 뛰쳐나왔지만 그들도 저격병들의 표적이 되어 쓰러졌다.

 

신군부는 이 무모한 도발로 사태를 마감시킬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공포에 질린 시민들이 흩어져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광주 시민들은 신군부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수준에서 움직였다.

 

핏빛 고통이 시민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바로 그 무렵 다수 청년들이 차량을 나누어 타고 광주 인근 지역으로 빠져나갔다. 경찰 병력이 남김없이 광주로 차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들 지역은 무방비 상태였다. 청년들은 손쉽게 파출소와 예비군 무기고를 깨뜨리고 무기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도청 앞 발포로부터 약 두 시간 뒤인 오후 315. 무기를 획득한 청년들이 최초로 광주시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시민들의 열광적인 환호 속에서 무기를 실은 차량이 줄을 이어 도착했다. 무기는 즉각 분배되었다. 시민들은 저마다 무기를 손에 쥐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역사의 분수령으로 만든 무장 시위대가 탄생한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일컬어 시민군이라 불렀다. 시민군 숫자는 순식간에 1,000명을 넘어섰다. 시민군은 계엄군을 시내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광주는 해방되었다.

 

광주가 해방된 기간 동안 시민들은 계엄군이 시 외곽을 빈틈없이 봉쇄하고 있는 조건에서 역사상 보기 드문 공동체 질서를 유지했다.

매점매석을 엄격히 자제하는 가운데 부족한 생필품을 고르게 나누어 썼다. 평소 흔했던 강도나 절도도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함께 모여 술을 마시거나 술 취한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도 없었다. 부상자 치료를 위한 헌혈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신군부는 군사작전지휘권을 쥐고 있는 미국의 공식 승인과 엄호 아래 광주에 대한 마지막 진압 작전에 돌입했다. 작전에 투입된 부대는 2만여 명에 이르렀다. 시민군은 본부로 사용해온 도청 사수를 결심하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물리적으로는 진압 부대를 당해낼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527일 새벽 330. 모든 광주 시민이 깨어 있는 가운데 도청 인근 사방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공수부대 3여단 특공조가 맹렬한 사격과 함께 도청을 공격해오기 시작했다. 헬기에서 기관총을 거칠게 난사하는 가운데 계엄군은 건물 곳곳에 수류탄을 던지면서 M16소총을 연발로 긁어댔다. 그 상황에서 시민군이 할 수 있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한 투철한 희생정신을 내외에 천명하는 것뿐이었다.

 

광주는 처절하게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하지만 광주는 죽지 않았다. 광주는 유혈 낭자한 모습으로 역사의 한복판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광주가 내지른 분노의 포효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 심장에 꽂혔다. 그로부터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잇달아 침묵 속에서 깨어났다. 두려움을 떨치고 억압에 맞서 투쟁하기 시작했다. 민주화 대장정이 역사의 무대 위에 장엄하게 펼쳐졌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이 기적을 일으키는 역사적 사건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결정적으로 두 장면 때문이었다.

 

만약 521일 계엄군 도청 앞 발포 이후 광주 시민이 시민군 결성 없이 상황에 굴복했다면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아마도 후대 사람들은 518광주를 무모한 저항을 시도했다가 극심한 피해를 입은 사건정도로 기억했을 것이다. 그런 경우 십중팔구 저항을 회피하는 심리를 갖게 되기 쉽고, 상당히 오랫동안 침묵과 굴종이 한국 사회를 지배했을 것이다. 만약 시민군이 계엄군의 최후 진압 작전에 맞서 도청을 사수하지 않고 피신했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했을까? 아마도 후대 사람들은 누구든지 강력히 저항하다가도 목숨이 위태로우면 도피하기 마련이라는 생각을 품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를 근거로 압제에 대한 굴종과 타협을 합리화했을 것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시민군 결성과 도청 사수는 군사독재에 굴종하고 타협할 여지를 깡그리 날려 버렸다. 억압에 맞서 투쟁하지 않고는 양심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주역들은 역사상 가장 의미심장하고도 강렬한 리더십을 발휘함으로써 지금도 우리에게 칼날 같은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부채의식의 연쇄사슬, 민주화 대장정

 

광주민주화운동 다음 해인 19815181140분 무렵 서울대 학생회관 3층을 점령한 학생 두 명이 창틀에 올라서서 반파쇼 민주화 투쟁 선언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학생 1,000여 명이 시위대열에 합류해 살인마 전두환을 타도하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 시위 학생들은 열 배나 많아 보이는 경찰 병력과 맞서 두 시간에 걸친 치열한 투석전을 전개했다. 다수 학생들이 연행되었고 시위 주동자는 형사들에게 개처럼 질질 끌려갔다. 학내 분위기는 크게 술렁거렸다. 곳곳에서 격한 시국토론이 불붙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인 521일 비슷한 장소에서 더욱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그날은 원래 학예제가 예정되어 있었다. 경찰이 이를 극력 저지하자 1,000여 명의 학생들이 오전 1130분부터 침묵시위에 돌입했다. 오후 320, 김태훈(경제학과 4학년) 학생이 중앙도서관 6층 창문을 열고 전두환 물러가라!”를 세 번 외쳤다. 그런 다음 곧바로 시멘트 바닥을 향해 투신했다. 광주 출신인 스물넷 젊은 청춘은 역사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시신 주위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경찰은 최루탄을 퍼부었다. 학생들이 무차별적으로 연행되었다.

 

수많은 학생들이 충격 속에 휩싸여 쉽게 헤어나지 못했다. 고뇌의 시간을 거치면서 학생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1년 전 광주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 수 있었다. 광주의 진실에 한 걸음씩 다가가면 갈수록 비굴함, 위선, 현실도피 등의 단어가 학생들의 가슴을 더욱 격하게 짓눌렀다.

 

518광주민주화운동에 가장 즉각적이면서도 격렬한 반응을 보인 것은 학생운동이었다. 학생운동 활동가들은 518광주민주화운동 이후 고통스런 번뇌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특히 서울 지역 학생운동 활동가들은 극심한 죄의식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19805월 서울 지역 대학생들은 이른바 서울역 회군을 통해 신군부의 517군사쿠데타에 길을 터주었다. 광주가 피 흘리며 싸우고 있는 순간에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죄의식을 다소나마 털어버릴 수 있는 길은 모든 걸 바쳐 투쟁하는 것뿐이었다.

 

그로부터 재적과 구속 심지어 죽음까지 불사한 투쟁이 끝없이 이어졌다. 1981년에서 1983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1,400며 명의 학생들이 제적되었고, 그 수를 정확히 알 수 없을 만큼 많은 학생들이 강제 징집되었다. 구속자 수 또한 상당한 규모에 이르렀다. 1980년에서 1987년까지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국가보안법 등으로 구속된 양심수는 12,000여 명이 넘었는데 그 중 절대 다수가 학생운동 출신이거나 활동가였다.

 

학생운동 활동가들의 자기희생적인 투쟁은 수많은 학생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518광주의 진실에 다가갈 계기를 마련해주었고 나약한 삶을 되돌아보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학생운동 대열에 합류하는 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1980년대 학생운동은 세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그 규모가 1년마다 수십 배 이상 불어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학생운동의 치열한 투쟁은 대중의 마음을 움직였다. 518광주에 대한 진실 공유는 모든 것의 기초였다. 백성을 향해 총을 난사한 학살자가 여전히 권좌를 지키고 있는 나라에서 투쟁하지 않는 것은 치욕이자 자기기만이었다. 그런 점에서 독재에 정면으로 맞서 투쟁하는 학생운동은 그 자체로 정의의 확신이었다.

 

학생운동을 지배한 것은 부채의식의 연쇄사슬이었다. 학생운동 활동가들은 518광주 시민들에게 강한 부채의식을 품고 있었고 자기희생적인 투쟁으로 응답했다. 그러한 모습은 또 다른 부채의식으로 이어지며 훨씬 많은 학생들로 하여금 학생운동 대열에 합류하도록 만들었다. 운동에 참가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양심을 가진 학생들이라면 저마다의 입장에서 부채의식을 가져야 했다. 그들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학업에 열중하면서 투쟁에 동참하지 못한 점을 늘 미안해 했다.

 

부채의식의 연쇄사슬은 학생 사회를 넘어 일반 시민으로까지 확장되었다. 5·18광주의 진실은 시간이 흐르면서 대부분의 시민 사이에 알려졌다. 산골 벽지 촌부들마저 19805월 광주에서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 5·18광주는 시민들로 하여금 단순명료한 정치적 판단을 내리도록 만들었다. 그 어떤 미사여구와 치적도 학살자의 집권을 정당화시켜줄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학생운동의 자기희생적인 투쟁은 이를 지켜만 봐야 하는 처지에 있던 시민들로 하여금 강한 부채의식을 갖도록 만들었다. 학생 대중과 마찬가지로 시민들 또한 마음으로 학생운동을 지지했고 함께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 사실은 1985년을 넘어서면서 학생운동을 상징했던 인물들이 대거 국민 스타로 등극한 것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시민들의 부채의식은 학생운동 출신자들이 다양한 영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으로 작용했다. 학생운동 활동가들은 대학을 떠나 노동, 농민, 청년, 재야 등으로 부챗살처럼 퍼져나가 민주화운동을 일구었다. 민주화운동은 학생운동을 넘어 전 시민적인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지배한 것은 온전한 의미에서 시민주의였다. 민주화운동 대열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5·18광주시민 앞에 숙연한 자세를 취했고, 그로부터 전해지는 메시지를 가슴 깊이 새기었다. 저마다 부채의식을 품고 출발한 상황에서 엘리트주의가 발호할 여지는 별로 없었다. 지적 오만을 드러내는 것은 쉽게 경멸 대상이 되었다. 철저한 자기희생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어설픈 소영웅주의가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학생운동에서 지도적 역할을 했던 핵심 활동가들의 마지막 선택은 대체로 자발적 감옥행이었다. 시민주의를 바탕으로 민주화운동은 한층 고결해질 수 있었다. 민주화운동은 해방 이후 좌익운동과는 풍모나 모든 점에서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학생운동을 선두로 민주화운동은 전두환 군사정권을 향해 파상공세를 취했다.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는 시위 대열과 게릴라전을 응용한 시위 전술 등으로 경찰력은 빠르게 무력화되어 갔다. 여당 중앙당사 등에 대한 잇따른 점거 투쟁은 정권에게는 경종을 울림과 동시에 시민들 가슴을 통쾌하게 만들었다. 구속자 가족들의 열정적 활동은 민주화운동에 대한 국민적 반항을 불러일으켰다.

 

1987년 단군 이래 최고 호황이라고 하는 ‘3저 호황한복판을 통과하고 있던 무렵이었다. 3저 호황으로 중산층의 경제 사정은 눈에 띄게 호전되고 있었다. 정치 상황을 외면하고 현실에 안주하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하지만 시민들은 전혀 다른 태도를 취했다. 가령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소가 그 해 5월 초 중산층 1,04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의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85.7%가 경제성장을 늦추더라도 인권을 신장시켜야 한다고 대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부채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시민들에게는 민주화는 경제적 이해타산을 넘어서는 과제였다.

 

 

 

1986년에서 1988년까지 진행된 현상으로 저유가, 저금리, 저달러로 야기된 호황을 가리킨다. 국제원유가격의 하락으로 빚어진 저유가는 수입 원자재 비용 부담을 크게 줄였다.

 

국제 금리 인하로 인한 저금리는 상당한 규모에 이르렀던 외제 상환 부담을 대폭 경감시켜 주었다. 달러 대비 엔화 가치 급등은 일본 제품 대비 한국 제품 경쟁력을 강화시키면서 대미 수출 급증을 가능하게 했다. 3저 호황은 이 모든 것이 빚어낸 종합적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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